과학 공동체 안에서 내가 풀어야 할 문제
답을 알고 나서도 한참을 더 공부해야 이해가 되는 문제가 있다. 직접 풀어보는 동안에야 왜 중요한지 알게 되는 문제도 있다. 테런스 타오는 AI와 수학에 관한 글에서 한 문제를 연구하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배우는지 묻는다. 그가 예로 든 것은 아이들이 서로 더 큰 수를 말하며 노는 모습이다. 아무리 큰 수를 말해도 상대는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탠다. 그렇게 겨루는 사이에 아이들은 어떤 수보다 더 큰 수가 늘 있다는 것을 알아간다. 어른이 가장 큰 자연수는 없다고 말해주면 답은 금방 얻는다. 그러나 아이들이 스스로 궁리하며 배우는 즐거움까지 어른이 대신해줄 수는 없다. 기초연구에서도 타오가 가치를 두는 것은 기존 방법이 왜 통하지 않는지 알아보고 필요한 개념이나 기법을 새로 고안하고 다른 문제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문제를 풀어가는 동안 연구자는 다음에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배운다. AI로 답만 얻으려 들면 이런 배움을 놓치게 되리라는 것이 그의 염려다 (타오의 AI와 수학에 관한 글). 허준이 교수는 자신이 왜 어떤 문제에 관심이 생겼는지 동료에게 설명하려면 그동안의 경험과 생각을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떤 구조가 있을 것 같다는 직관이 생기면 그것을 설명할 언어가 이미 있는지 먼저 공부하고 마땅한 언어가 없으면 동료와 함께 만들어간다고 했다. 논문에 다 적지 못한 직관과 동기, 그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 사정도 그런 대화에서 오간다. 논리적 과정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일, 그는 그것을 수학의 핵심으로 본다(허준이 인터뷰).
두 사람의 말을 읽으며 나는 대학원생이 인식적 주체성(Epistemic agency)을 어떻게 길러 가는지 생각하게 된다. 자기 생각을 동료에게 설명하다 보면 안다고 여겼던 내용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 다시 공부해야 할 때가 있다. 동료와 의견이 엇갈리면 자기 생각의 근거를 다시 따져보게 되고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들으면 처음 생각을 고치기도 한다. 교수와 동료는 그 판단을 함께 검토하되 연구의 방향을 정하고 필요하면 고쳐보는 일은 학생이 직접 하도록 도와야 한다. 많은 경우가 그러하듯 학생마다 관심이 가는 논문은 다르다. LLM-Wiki를 이용한 대학원 수업을 해봤을 때도 그러했다. 그림 하나를 한참 설명하는 학생이 있었고 논문에 적힌 한계를 보고 다음에 읽을 논문을 찾아 나서는 학생도 있었다. 같은 주제를 두고 왜 서로 다른 데이터와 방법을 썼는지 궁금해하는 학생도 있었다. 학생들은 읽은 내용을 정리하고 개념을 이어서 수업에서 발표했다. 발표가 끝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남았다. 이 학생들은 다음에 무엇을 더 알아보고 싶어 할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설명되지 않은 현상을 노트에 적어두고 다음 논문을 골라 읽다 보면 더 알아내고 싶은 문제가 생기곤 한다. 앞선 연구자들은 왜 그 문제를 아직 풀지 못했을까, 거기에 나는 무엇을 보탤 수 있을까, 학생들이 그런 생각까지 해보기를 나는 바랐다.
Epistemic agency, 인식적 주체성은 무엇을 알아낼지 스스로 정하고 지식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는 능력과 권한을 뜻한다. 공동체가 풀지 못한 문제를 자기 연구의 과제로 받아들이기까지 대학원생이 배워야 할 것은 많다. 그 문제가 왜 중요한지, 앞선 연구가 어디까지 답했는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그래야 자신이 보탤 몫이 가늠된다. 무엇을 더 확인할지 정했다면 왜 그것인지 설명도 따라야 한다. 연구를 하다 보면 배운 지식도 다시 검토되고 고쳐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 일에 자신도 낄 수 있다. 다만 설명을 고치려면 다른 연구자가 검토할 만한 근거를 내놓는 것이 먼저다. 지식이 무엇이고 자신이 그것을 만드는 데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새로 이해하게 되니 인식론적 전환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우선 내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과 과학 공동체가 아직 답하지 못한 것을 구별하는 일부터가 쉽지 않다. 나에게 낯선 현상이 앞선 연구에서는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을지도 모른다. 논문 한 편에 한계라고 적힌 내용을 후속 연구에서 다루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관련 논문을 더 읽고 그 분야를 아는 사람과 이야기해봐야 한다. 어떤 설명이 받아들여지고 어디서 의견이 갈리는지 아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같은 관찰을 두고 서로 다른 가정을 썼다면 왜 그런 가정이 필요했는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그러는 사이 노트에 적어둔 의문은 더 구체적으로 고쳐지고 그중 몇은 답을 찾는다. 그래도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남으면 어떤 자료와 방법으로 조사할지 생각해볼 차례다. 연구할 문제를 찾는 동안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었는지를 거듭 알게 된다. 가령 같은 생물학적 현상을 다룬 두 논문의 설명이 서로 다르게 보인다고 하자. 처음에는 왜 다른지 모른 채 두 논문의 요약을 나란히 적어두게 된다. 원문을 읽고 나서야 측정한 대상이나 비교한 조건이 달랐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 차이로 결과가 설명되면 처음 품었던 의문을 고치면 된다. 그래도 설명이 되지 않으면 기존 설명이 통하는 범위가 생각보다 좁은 것인지, 두 연구가 함께 놓친 조건이 있는 것인지 따져보게 된다. 자료를 다시 분석하면 이 가능성들이 구별되는지도 살펴보아야 할 대목이다. 비교할 조건을 정하고 그 이유를 동료에게 설명하는 순간 학생은 이미 자기 연구에서 무엇을 할지 결정하고 있는 셈이다. 새로 얻은 결과에 따라 처음의 질문은 또 달라진다. 알아낸 것을 다른 연구자가 이해하고 검토할 수 있게 내놓을 때 두 논문을 읽으며 품었던 의문에 자기 답이 보태진다. 어떤 답이 나올지 처음부터 다 알 필요는 없다.
우리가 연구에 쓰는 개념과 자료와 방법은 누군가 먼저 만들고 검토해둔 것들이다. 그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알아야 자기 선택도 설명이 된다. 혼자 다루기 어려운 부분은 다른 전문성을 지닌 동료와 함께 풀 일이다. 함께 정한 질문 가운데 한 부분을 맡아 확인하기도 한다. 작은 분석 하나를 맡았더라도 그 결과가 전체 질문의 어디에 답하는지 알아야 다음 할 일을 제안할 수 있다. 제안할 때는 동료가 검토할 근거를 함께 내놓는다. 반론을 듣고 설명을 고치는 동안 공동 연구에 참여하는 법을 익힌다. 얻은 답과 아직 풀지 못한 부분을 함께 밝혀두어야 다른 연구자가 다음 질문을 세우거나 기존 설명을 고칠 때 참고할 수 있다.
AI에게 논문 정리와 연구 질문과 분석 계획까지 한꺼번에 제안받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학생은 그중 하나를 골라 꽤 구체적인 계획서를 만들어 올 것이다. 나는 그 계획서를 놓고 학생과 이야기해보고 싶다. 왜 그 문제를 다루려 하는지, 앞선 연구가 무엇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는지를 학생 자신이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추천받은 문헌을 더 읽고 나서 문제를 잘못 잡았다고 판단하게 될지도 모른다. 교수나 동료가 건넨 질문을 연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 질문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범위를 조정하고 다음에 확인할 것을 정하는 동안 그 질문을 자기 과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 처음 질문에 담긴 가정 가운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바꾸었는지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LLM-Wiki에 기록해두면 학생이 생각을 바꾼 까닭을 함께 되짚어볼 수 있다. 어떤 현상이 궁금해서 논문을 읽다가 다른 논문이 이미 설명한 부분을 알게 되면 질문은 좁아진다. 새로 읽은 논문 때문에 조사할 조건이 바뀌기도 한다. 페이지의 문장을 고칠 때 그 이유를 적어두면 어떤 근거로 질문을 바꾸었는지 나중에 다시 읽어볼 수 있다. 밝히려는 문제가 구체적이면 원문의 한 문장을 잘못 읽었을 때 다음 분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따져볼 수 있다. 읽고 분석하며 내린 판단은 다음에 어떤 근거를 더 구할지 정할 때 다시 쓰인다.
지금 자신이 배우고 확인해야 할 부분이 어디인지는 AI에게 무엇을 맡길지 고를 때도 먼저 생각할 문제다. 낯선 방법을 직접 살펴본 경험이 다음 연구에서 그 방법을 쓸지 말지 판단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발표 때는 질문이 어떻게 달라졌고 그래서 다음에는 무엇을 할지 설명해보게 한다. 학생이 자기 문제를 갖도록 도우려면 가르치는 나도 학생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처음에는 연구할 만한 현상과 읽을 논문을 내가 제안한다. 학생이 잘 이해하지 못했거나 더 알아보고 싶은 부분을 고르면 누가 이미 다룬 문제인지, 가진 자료로 어디까지 조사할 수 있는지 함께 검토한다. 가능한 방법을 설명해주고 학생이 그중 하나를 고른 이유를 들어본다. 학생이 고른 방법을 실제 연구에 적용하도록 돕는 것은 교수의 일이다. 예상하지 못한 의문이 생기면 수업이나 연구실에서 함께 들여다볼 시간도 필요하다. 학생이 다른 근거를 가져오면 나도 처음 제안한 방향을 고칠 줄 알아야 한다. 질문을 좁히거나 설명을 바꾼 과정을 평가에서 인정해주어야 학생도 생각이 달라진 까닭을 드러낸다. 작은 범위에서 결정하고 설명하고 고쳐보게 한 뒤에 더 많은 선택을 맡기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과제를 마친 뒤에도 학생에게 더 알아보고 싶은 것이 남아 있으면 좋겠다. 더 읽을 논문을 고를 이유가 있고 다음 분석에서 확인하고 싶은 조건이나 동료에게 의견을 구할 해석이 있으면 좋겠다. 당장 확인할 수 있는 작은 부분부터 연구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조사해보니 처음 생각한 문제가 중요하지 않아서 질문을 바꾸거나 다른 연구에 참여하게 될 수도 있다. 그때 무엇을 알아내려 했고 어떤 근거로 생각을 바꾸었는지 설명할 수 있다면 동료들도 그 결과를 검토하고 다음 할 일을 함께 의논할 수 있다. 대학원에서 배우는 동안 학생이 자기 질문과 근거를 들고 그 의논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AI와 함께 정리한 위키에서 아직 풀지 못한 문제를 하나 골라 함께 읽어도 좋겠다. 다음에 만나면 그 문제를 알아보려고 무엇을 해보았는지, 해보고 나서 생각이 어떻게 변했는지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