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탐구, 책임의 주체로 오는 당신을 기다리며
이번 학기 대학원 수업에서는 카파시 박사의 LLM-Wiki를 사용했다. 나도 이번 학기, LLM-Wiki와 함께 재밌게 공부하고 연구하고 있다. 이 내용을 대학원 수업에 써보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학기 도중 빠르게 방법을 적용해봤다.
우선, 카파시가 제안한 방식대로 LLM으로 얻은 요약과 생각을 마크다운 파일로 남긴다. 그것을 다시 읽고 연결하며 개인 지식 저장소로 키워간다. 나는 그 방식을 연구자들의 논문 읽기와 프로젝트 정리에 맞게 조금씩 바꾸어 써왔다. 연구실에서는 논문을 많이 읽지만 읽은 논문이 나중에 다시 쓰일 수 있는 형태로 남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떤 논문은 PDF 폴더에만 남고 어떤 질문은 회의 중에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고 어떤 요약은 대화창 안에서 닫힌다. 이번 수업에서 학생들과 해보고 싶었던 일은 거창하지 않았다. 읽은 논문이 사라지지 않게 하고 떠오른 질문이 다음 주에도 다시 열릴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 학기 초반에는 LLM-Wiki의 개념과 사용 방법을 가르쳤다. 카파시의 원래 아이디어에서 무엇을 가져왔는지, 연구자용으로 쓰면서 무엇을 바꾸었는지, 논문을 읽은 기록을 마크다운으로 남기는 일이 왜 필요한지 설명했다. 이후에는 매주 두세 명의 학생들이 돌아가며 본인의 LLM-Wiki를 어떻게 구성하고 쓰는지 발표했다. 운영 구조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논문 요약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개념 페이지를 어떻게 나누었는지, 읽은 논문에서 어떤 질문을 남겼는지 보여주었다. 발표가 끝나면 다른 학생들과 그 방식을 두고 이야기했다. 어떤 정리는 나중에 글로 이어질 수 있고 어떤 구조는 너무 복잡하며 어떤 연결은 더 확인해야 하는지 같이 보았다. 학기말에는 이렇게 조사하고 정리한 논문들을 바탕으로 한 가지 주제를 정해 3000단어 정도의 에세이 또는 종설논문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매 수업마다 학생들은 본인의 LLM-Wiki를 옵시디언 그래프로 열어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서로 연결된 페이지도 있고 따로 떨어져 있는 페이지도 있었다. 수업에서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그래프의 모양 자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양을 보고 학생이 어떤 설명을 하는지가 중요했다. 왜 이 논문은 기존 개념과 연결되지 않았는가. 같은 단어를 쓰는 두 논문은 정말 같은 질문을 다루고 있는가. 새 페이지를 만드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기존 페이지를 고치는 것이 나은가. 그래프는 답을 주지 않았다. 다만 학생이 무엇을 판단해야 하는지를 드러내주었다. 그래서 수업에서 “읽었습니다”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논문 때문에 어떤 페이지를 새로 만들었는지, 어떤 개념 설명을 고쳤는지, 어떤 질문이 남았는지를 말해야 했다. 논문을 읽는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읽은 논문이 자기 위키 안의 어느 문장을 바꾸는지까지 확인해야 했다.
AI 요약은 제출할 답안이 아니었다. 수업에서는 요약을 받은 뒤 원문과 맞는지 다시 확인하게 했다. 어떤 문장은 원문에 충실한 요약이고 어떤 문장은 모델이 조금 앞서간 해석에 가깝다. 어떤 개념은 논문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지만 어떤 개념은 배경 설명으로 잠깐 지나간다. 이 구분은 여전히 학생이 해야 한다. 요약이 빨라졌다고 해서 읽기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요약이 많아질수록 학생이 판단해야 할 일이 늘어난다. 자료가 많다는 것과 이해가 깊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수업 중에는 학생의 머리가 컴퓨터 안에만 있게 되는 상황을 걱정하는 말도 나왔다. 위키를 잘 만들어놓았는데 막상 질문을 받으면 자기 말로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이 말은 중요했다. LLM-Wiki는 기억을 도울 수 있지만 이해를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그래서 정리하는 시간이 줄어든 만큼 더 많이 설명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 앞에서 자기가 읽은 논문을 말해보고 질문을 받고 모르는 부분이 드러나는 과정을 지나야 한다. 위키는 더 나은 대화를 준비하는 도구여야 한다.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이 어떤 주제에 오래 머무는지도 보게 되었다. 어떤 논문은 요약만 하고 지나간다. 어떤 논문은 발표가 끝난 뒤에도 질문이 남는다. 어떤 학생은 그림 하나를 오래 붙잡고 설명했다. 어떤 학생은 논문의 한계 부분에서 다음에 읽을 논문을 찾았다. 어떤 학생은 같은 주제를 다루는 논문들이 서로 다른 데이터와 방법을 쓰고 있다는 데 관심을 보였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그 순간이었다. 남의 논문에 있던 질문이 학생의 노트 안으로 옮겨와, 다음에 더 읽고 더 확인해야 할 물음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그때부터 그 주제는 남의 지식이 아니라 학생이 이어서 다뤄야 할 질문이 된다. 대부분의 과학 교육에서 학생은 이미 정리된 지식을 배우는 사람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지식을 찾아내는 사람으로 옮겨가야 한다. 그 이동이 일어나려면 자기 질문이 생겨야 한다. LLM-Wiki 수업에서 학생들이 페이지를 만들고 연결을 고치고 질문을 다시 적은 일은 모두 그 이동과 관련되어 있었다.
과학자는 대개 거창한 선언보다 작은 불일치 앞에서 오래 머문다. 표의 한 칸, 그림의 한 점, 반복 실험에서 자꾸 어긋나는 값이 기존 설명의 빈틈을 드러낸다. 우리가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부르는 일도 실제 현장에서는 그런 작은 틈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현실의 과학자들이 하는 일은 대개 훨씬 더 작고 오래 걸린다. 실험을 하고 데이터를 쌓고 기존 설명이 잘 맞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나눈다. 어떤 결과는 이미 알려진 설명 안에 들어간다. 어떤 결과는 기존 설명으로 잘 덮이지 않는다. 과학자는 그 작은 틈을 보고 다시 실험한다. 다시 분석한다. 다시 설명을 고친다. 지식의 경계는 그런 식으로 조금씩 밀린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배운다는 것은 그 과정을 멀리서 구경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학생은 어느 순간 그 경계 앞에 서야 한다. 이 논문은 무엇을 밝혔고 무엇을 아직 남겨두었는가. 이 데이터는 어디까지 말하게 해주고 어디서부터는 조심해야 하는가. 이 질문을 이어서 다루려면 어떤 논문을 더 읽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자기 손으로 붙잡기 시작할 때 학생은 피동적인 학습자에서 벗어난다. 그는 과학 지식을 발굴하고 정리하고 판단하는 일에 자기 몫을 갖게 된다.
그래서 대학원 수업에서 가르쳐야 하는 것은 논문 읽는 요령만은 아니다. 학생은 연구 질문을 스스로 이해하고 선택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방법론이 왜 그 질문에 맞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데이터의 한계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해석의 강도와 약점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틀렸을 때 고칠 수 있어야 한다. 이 능력은 한 번의 과제로 생기지 않는다. 논문을 읽고 요약하고 다시 원문을 확인하고 다른 논문과 연결하고 자기 말로 설명하는 일이 반복되어야 한다. 그 반복 속에서 학생은 과학 공동체 안의 일원이 된다.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이름을 올리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고른 논문, 내가 만든 연결, 내가 쓴 문장, 내가 내린 판단을 다른 연구자들이 검토할 수 있도록 내놓는다는 뜻이다. 그때의 책임은 증거 앞에서 너무 많이 말하지 않는 일, 모르는 것을 빈칸으로 두는 일, 남의 결론을 가져올 때 근거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자기 질문을 세우되, 그 질문이 과학 공동체 안에서 검토될 수 있는 형태가 되도록 다듬는 책임이다.
학부 수업에서도 적용해볼 수 있을까. 다음 학기에는 이것을 조금 작은 단위로 시험해보고 싶다. 학부생은 전공 지식을 배우지만 그 지식이 어떤 질문과 연결되는지 모를 때가 많다. 통계학을 배운 학생이 유전체 데이터 분석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생물학을 배운 학생이 질환 예측 모델링에 끌릴 수 있다. AI를 배운 학생이 실제 연구 데이터 앞에서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막막해할 수 있다. 이때 더 많은 과목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학생이 읽은 자료를 자기 질문과 연결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한 편의 논문을 읽고 그 논문이 답한 질문과 남긴 질문을 나누어 적는 일부터 시작할 수 있다. 하나의 개념 페이지를 만들고 다음 논문을 읽은 뒤 그 페이지를 고쳐보게 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3000단어 글을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 한 페이지를 만들고 한 질문을 남기고 한 연결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작할 수 있다. 대학 교육은 전공 지식을 전달하면서 동시에 학생이 작은 단위로 자기 판단을 연습하게 해야 한다. 학생이 교수의 설명이나 교재의 문장을 그대로 받아쓰는 데서 멈추지 않고 왜 그런지, 어디까지 맞는지, 다음에는 무엇을 더 읽어야 하는지 묻게 해야 한다.
AI가 들어온 뒤 대학의 역할은 더 어려워졌다. 학생들은 앞으로 AI 없이 공부하거나 연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논문을 찾고 요약하고 코드를 쓰고 발표 자료를 만들고 글의 초안을 다듬는 과정에 AI가 들어온다. 그러면 대학은 AI를 허용할지 금지할지의 문제에만 머물 수 없다. 학생이 AI와 함께 만든 결과를 어떻게 검토할지 가르쳐야 한다. 어디까지 자기 이름으로 말할 수 있는지도 가르쳐야 한다. 빠른 답을 얻는 능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빠른 답이 곧 자기 판단은 아니다. 학생은 AI가 만든 요약을 원문과 대조해야 한다. 논문 사이의 연결을 스스로 정해야 한다. 어떤 질문이 남았는지 자기 말로 적어야 한다. 내가 이번 수업에서 기대한 변화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학생이 남이 준 과제를 처리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이 질문은 내가 끝까지 붙잡아보겠다는 쪽으로 옮겨가는 것. 과학 지식을 소비하는 사람에서 과학 지식을 발굴하는 사람으로 옮겨가는 것. 과학 공동체 안에서 자기 몫을 가지고 그 몫에 따르는 판단의 책임을 배우는 것. LLM-Wiki는 그 일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다만 학생이 읽고 묻고 고치고 다시 설명하는 과정을 남겨준다. 도구는 점점 더 빨라질 것이다. 그래서 빠른 도구 곁에는 느리게 확인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무엇을 남길지, 무엇을 지울지, 무엇은 아직 말하지 않을지 판단하는 사람 말이다.